“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왕후가? 짐에게요?”
왕후라는 단어에 난데없이 나타난 해류를 무섭게 노려보던 야장들이 일제히 머리를 수그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건 태왕뿐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믿기에, 그것이 차라리 자비롭다고 믿기에 더 냉혹하게 굴었다. 그렇지만 명림 집안의 딸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죄가 없는 해류에게 심한 처사는 아니었는지. 조금 부드럽게 거부하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지. 원치 않는 상념들이 내내 그를 괴롭혔다.
쇠를 두드리며 불필요한 죄책감과 잡념에서 벗어나려고 야장간에 왔다. 겨우 머리를 비워내나 싶었더니 그 당사자가 찾아온 거였다. 희한하게 불쾌감보다는 호기심이 찾아왔다. 그는 이마에 묶은 건을 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가 팔을 들자 멀찌감치 있던 시종이 잽싸게 달려와 그의 어깨에 저고리와 포를 걸쳐줬다.
“이런 차림새라 예의에 어긋납니다만…….”
“아닙니다. 제가 불쑥 찾아온 것을요.”
불청객이니 쫓아내거나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남의 앞에서는 최소한의 예우는 해주니 그나마 감지덕지였다.
“돌아가면서 얘기를 나눕시다.”
화로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안에서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타는 듯 뜨거운 곳에 있다 보니 상쾌하게 느껴지는 밤의 대기를 즐기며 태왕이 반걸음 뒤에 있는 해류를 천천히 돌아봤다.
“하고프단 말씀을 이제 하십시오.”
과연 태왕에게 이게 씨알이나 먹힐 것인가. 회의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해류는 스스로를 격려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펴고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명림가와 절노부에 생각하시는 바대로 전부 하십시오. 저는 그것을 절대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해류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거침없이 나가던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탐색하는 눈초리를 느끼며 해류는 준비하던 제안을 펼쳤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 제 아비나 명림가에 아무 정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물론, 필요하시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대신 모든 뜻을 이루시면 그때는 저를 왕후에서 폐하여 어머니와 떠나게 해주세요. 그리고 폐하께서는 원하시는 여인을 왕후로 삼아 화목하게 왕실을 번영시키세요.”
“폐하여달라고요? 그게 무엇을 포기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여인 중에 가장 높은 왕후라는 자리지요.”
“그런데 버리겠다고요?”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심입니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대답이 해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예. 진심으로 원하여 간청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해류가 하는 소리가 믿기지 않았지만 음성과 태도엔 진심이 가득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절실함은 가장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녀가 정말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그저 분김에 나온 소리일지 궁금해졌다.
“짐이 뜻을 이루면 명림가는 그야말로 풍비박산,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폐왕후가 된 그대가 의탁할 친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왕후의 모친이 물려받은 재산도 역시 명림가에 속했으니 함께 사라질 거고요. 어머니와 어찌 살아가려고 그리 대담한 요구를 하는 건지요?”
물정 모르는 이 여인에게 각박한 현실을 알려주는 건 그가 지닌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그런데 두려워하거나 놀라기는커녕 해류는 활짝 웃었다.
“폐하께서 저희 모녀에게 목숨과 자유만 주시면 앞가림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절대 폐하께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 부디 믿어주시고 그 약조만 해주십시오.”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이 여인이 무슨 계획을 품고 있는지. 정말 지금 장담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지. 잠시 고심하던 그는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만을 약속했다.
“왕후의 뜻은 잘 알았으니…… 숙고하겠습니다.”
어차피 태왕이 단번에 믿고 승낙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예상 이상의 성과였다.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해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했다.
“고맙습니다. 폐하께 충성하고,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으나 이 자리에 있는 동안만큼은 왕후로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명림해류도 저렇게 밝게 웃을 줄 아는구나.
그는 새롭게 발견한 사실을 가슴에 묻으며 환한 얼굴로 따라오는 해류를 곁눈질했다.
〈1권〉
“그대가 명림가의 딸이 아니라 짐의 왕후라는 본분을 지키는 한, 그대를 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적 가문의 딸을 왕후로 들인 건흥 태왕 거련.
위대했던 부왕의 유업을 잇는 냉철한 군주로 일평생 자신을 다스려왔다.
그런데 왜 외면해야 할 왕후에게 마음 쓰이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눈길 하나에 화가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지.
그도 모르는 사이, 명림해류가 여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든 뜻을 이루시면 그때는 저를 왕후에서 폐하여 어머니와 떠나게 해주세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왕후가 된 명림해류.
초야부터 자신을 거부하는 태왕에게 충성을 대가로 거래를 청한다.
그녀가 태왕에게 원하는 것은 자유.
조금만 참으면 평생 바라던 걸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순간이 애타게 기다려지지 않는다.
간택 자리에 억지로 끌려 나간 해류와
원치 않는 여인을 왕후로 맞으라 강요당한 태왕.
두 사람 모두, 운명에 순응할 생각은 없다.
〈2권〉
“나는 고구려의 태왕이고 해류 그대는 왕후이자 내 유일한 반려요. 난 그대를 지킬 것이니 그대는 나를 지켜요.”
그를 유일하게 태왕이 아니라 사람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해류.
그런 해류를 앗아 가려는, 계속되는 위협.
해류를 완벽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은 통제할 수 없이 커져가고.
그 집착에, 광기에 곧 굴복할 듯 아슬아슬했던 그를 되돌린 것은 해류였다.
“저는 폐하의 곁을 지키고 돕는 왕후가 되겠습니다.”
많은 것을 홀로 지고 제왕의 길을 가야 하는 사람.
이이가 내 마음의 짐을 대신 지거나 덜어줄 수 없듯
이 사람이 감당할 무게를 내가 대신 짊어져줄 수 없다.
그래도 최소한 그 혼자가 아니게 같이 걸어가줄 수는 있다.
호쾌하고 너그러워 보이나 절대 사람을 믿지 않는 해류와
더없이 강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인정과 의지가 필요했던 태왕.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 차례
〈1권〉
序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
〈2권〉
十一
十二
十三
十四
十五
十六
十七
十八
十九
二十
結
후기
참고자료
이리리
좋아하는 것-해피 엔딩, 동족을 제외한 동물. 지오반니 갈리 초콜릿, 브뤼셀
싫어하는 것-새드 엔딩, 동물을 싫어하는 동족(인간만 살라고 만들어진 지구가 아닙니다), 서울의 바뀐 버스 노선(불가사의한 수준, 땅속 세상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멍·부
▣ 출간작
현향기
광시곡
마녀의 정원
연의 바다
영원의 미로(공저)
일월(日月)
49일夢(공저)
공작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