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겐 화풀이 대상, 어머니에겐 내보이지 못하는 모자란 딸 대역, 누나에겐 보모 역할이라면.”
자신이 말해놓고도 신기했다. 유진의 역할이 그의 가족에게 전부 다르다는 사실이.
“내겐 무슨 역할일까.”
생각도 안 해봤다는 듯 윤우가 중얼거렸다.
“나를 많이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제발…….”
울컥, 속마음이 터져버렸다. 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윤우에게 이 말을 해버린 걸까.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 끝이 어디인지 무서운 백 여사에게도, 그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숨죽이고 살고 있는 정은에게도, 제가 돌봐줘야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인 희정에게도 감히 묻지 못했다.
“제발. 듣기 좋네요. 계속해봐요.”
간절함이 절절하게 느껴져 윤우가 팔짱을 끼고선 재촉했다. 단단히 팔을 묶어두지 않으면 또다시 충동이 들리라. 손을 뻗고 옷을 찢어발겨 아침부터 내도록 궁금했던 것을 그녀에게서 찾으려 할 게 분명해, 윤우는 주먹을 쥐었다.
“배, 백 여사님이 무슨 생각인지……. 일이 너무 커져버렸어. 사람들은 내가 희정 언니인 줄 알아. 그렇게 돼버렸어.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그렇게 돼버렸어.”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는데, 백 여사가 그걸 두고 볼 리 없다. 정은의 말이 다 맞다. 백 여사는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유진은 최근 드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희정까지도 관계된 무시무시한 상상에 밤잠을 설친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니야…….”
정은이 그저 외출하자고 해 따라간 자리에서, 정재계의 유명한 사모님들한테 유진을 딸로 소개하며 인사시켰다.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죠.”
처음에는 몇 달에 한 번, 그리고 나선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현재는 보름에 한 번 정도일까. 물론 공적인 자리는 아니지만, 그런 모임에서의 눈도장과 입소문이 이쪽 세계에선 크게 작용한다.
결국 윤우가 치미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유진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낮게 혀를 찼다.
“내가 때릴 것 같아요?”
“그냥…… 놀라서…….”
손은 유진의 입술로 향했다.
“다시 말해봐요, 제발이라고.”
연한 빛 립글로스만 바른 유진의 입술을 그가 뚫어져라 바라봤다. 질척이는 시선에서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제발.”
“한유진은 당신 어머니에게도 내 아버지에게도 기적 같은 아이라.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을, 그들의 기적을 저주하고 미워할 수 있겠어요?”
한유진을 누나라 부르며 그녀의 곁을 맴도는 남자, 도윤우.
대현의 후계자이자 백 여사의 전폭적인 애정과 사랑을 받는 유일한 혈육인 그가,
그녀를 만났다.
제 엄마를 살리고자 같은 집, 맞은편 방에서
오랜 시간 가면을 쓰고 살아온 한유진에게 은밀한 제안을 건넨다.
“대현은 할머니 손에 있어요. 할머니 말이라면 모두가 죽는 시늉을 하고,
아니란 걸 알면서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한유진이 친손녀가 되는 일도 가능하죠.
반대로, 내 손에 있으면 한유진은 다시 한유진이 되는 거고.”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해줘.”
“권력에 기생해서 살아볼래요? 나는 아주 좋은 숙주가 될 텐데.”
▶ 차례
PROLOGUE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CHAPTER 06
CHAPTER 07
CHAPTER 08
EPILOGUE
SIDE STORY 01
SIDE STORY 02
SIDE STORY 03
SIDE STORY 04
유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예요?